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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 도록』

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 전시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사진 + 기획자 이혜원의 글/인터뷰 + 한아임의 <유랑 화가> 1화가 담긴 도록.

출판: 범고래출판사

참여 작가:


기획의 글 – 한아임 (도록에서 발췌)

좋지 않은 무언가는 과연 ‘무언가’일 수 있는가.

무슨 뜻인고 하면, 그야말로 은는이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단어에 따옴표를 빠뜨릴 수가 없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원래’ ‘이러이러하다’고 ‘받아들여지는’ 무언가의 ‘특징을 취하지’ 못하는 그것은 무언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가’?

일상은 무엇이고
원래란 무엇이며
이러이러하며 취해야 하는 특징은 또 무엇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해당되게 하고, 마침내 그러므로 그것을 그리 ‘볼 수 있다’고 결정짓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일상이 있고 그런 원래가 있고 그런 특징이 있고 그런 자들이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무언가’가 좋지 않음으로써 무언가가 안 되기도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를테면 “그런 건 좋지 않으니 사랑이 아니야”라고 하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게 되는가.
“그런 건 좋지 않으니 가족이 아니야”라고 하면 그 가족은 가족이 아니게 되는가.
혹은 “그런 건 나라가 아니야” “집이 아니야” “진짜가 아니야”라고 한다면?

누군가는 그걸 사랑이랍시고 하고, 가족이랍시고 받아들이고, 나라랍시고, 집이랍시고, 진짜랍시고 끌어안고 있는데, 어떤 다른 누군가는 그것은 기준에 맞지 않으니 좋지 않고, 따라서 사랑일 수 없고 가족일 수 없으며, 하여간에 그것이 해당된다고 주장하는 그 ‘무언가’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그 ‘무언가’가 인간인 경우에도 그렇다.
얼핏 들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목표는 참으로 숭고한 것 같으나, ‘좋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좋음이 통용되는 일상, 원래, 사회는? 그것들이 영원하길 바라는가? 영원하면 좋을까?

범주의 것과 범주 아닌 것 사이, 그리고 범주의 정의가 특정 시공간에서 하나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가 아니라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가 나는 그로테스크의 핵이라고 생각한다. 그 비유적 핵은 행성의 물리적 핵처럼 압축되어 껍데기 안에 잘 담겨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 핵조차도 범주만큼이나 견고한 동시에 유연해서 고체일 수도 있고 액체일 수도 있고, 언젠가는 터질 수도, 언젠가는 소멸할 수도 있다. 심지어 껍데기 역시 연약하기 그지없어서, 지금껏 인류 역사가 흐르는 도중 깨지지 않은 껍데기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정도밖에는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바로 그 껍데기도 조만간 깨질지도 모르지 않은가? 죽지 않는 존재는 더는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또 모르지만.

어찌됐든 그로테스크를 포함한 그 어떤 단어도, 그리고 단어가 담는 개념도, 한 시공간에서조차 단 하나의 핵과 단 하나의 껍데기만을 갖고 있는 경우는 없다. ‘원래’ ‘일상’적으로 ‘그러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란 대개 편의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통된 정의를 쓰며 어떻게든 에너지를 절약해보려다 생겨난 결과물이다. 결국 그 틀은 무너지거나 뒤틀리거나 사라져, 인간은 좋든 싫든 또 전과 후,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 그리고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 사이를 끊임없이 항해해야 한다.

그러다 상대주의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절대주의에 사로잡혀 반드시 ‘이래야 하는’ 틀에 부합하려고도 해 본다.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알지 않으려고도 해 본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를 ‘무언가’에 비추어 보지 않는 개인은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이 ‘무언가’에 맞는 완벽하거나 제일이거나 이상적인 서사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든, ‘무언가’에 맞지 않는 부적절하거나 모자라거나 혼란스러운 서사를 쓰고 있다고 여기든, ‘무언가’는 어떤 형태로든 ‘개인’이라고 나머지로부터 분리되어진 자들에게 속삭인다. 어디서 어떻게 그 ‘무언가’에 대한 개념이 그 개인 안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갖가지 통계로 한 장의 보고서에 요약할 수도 있고, 수천 년 전에 살았을 그자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100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수도 있다.

다 맞고 다 틀리다.
그러니 맞지도 않고 틀리지도 않다고 해도 맞고
알지도 못하면서 맞고 틀리다고 했으니 그게 맞고 틀리다고 해도 맞고 틀리다.

그 사이사이에 그로테스크는 촘촘히 도사린다.
그렇다고들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있어선 안 된다고 했던 것들은 버젓이 있고,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의 존재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좋지 않은 무언가는 무언가일 수 있는가’에서 ‘좋지 않은’을 다른 무엇으로 바꾼다 한들 결과는 마찬가지다. ‘좋지 않은’ 외의 어떤 기준 혹은 반(反)기준을 들이대도 똑같다.
그 기괴함의 무한한 편재성이 무서워 도망치거나 빠져들어도 역시 같다. 도망친 곳에 오히려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빠져들었더니 사그라들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이곳의 그로테스크는 어쩌다 그 작은 일부를 눈치채게 된 오늘 이곳의 사람들이 얼른 어떤 형태의 바구니에든 담아 기록을 남겨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여기가 아닌 곳의 사람들은 이런 것이 그로테스크하게 여겨지는 시절이 있었고, 있고, 충분한 시간만 지난다면 얼마든지 앞으로도 또 있을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은 또 그들의 그로테스크함을 감당하느라 바쁘지 않겠는가. 하나뿐인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의 기준에 부합하려 하며. 그럼으로써 아무리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지라도.

여러 사람들이 《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에 여러 시점을 기여했다. 그것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시도라 할지라도, 조만간 변모할 찰나의 기괴함을 어떤 이는 이렇게 소화했고, 또 그것을 보는 이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능동적 해석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음을 잠시나마 기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당신의 서사를 구성하는 ‘무언가’가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포함한 누군가의 기준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의 기개가 그 자체로 희열인 순간이 이 전시를 통해 더욱 잦아지길 바란다.